퇴근 후 매일 45분씩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야근하고 씻고 밥 먹으면 밤 10시인데 그 방전된 뇌로 45분 동안 온전히 노트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직장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저 역시 이 계획을 메모장에 적으면서도 "또 작심삼일로 끝나겠구나"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AI에게 "이 계획 어때?"라고 물어보면 뻔하게 "좋은 습관입니다! 꾸준히 해보세요" 같은 영혼 없는 응원이나 할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칭찬 대신 내 계획의 허점을 바닥까지 탈탈 털어달라고 시켰습니다.
개발자 매트 포콕(Matt Pocock)이 공개한 오픈소스 스킬 모음 중 'grill-me(grilling)' 스킬을 Claude Code 터미널에 설치해서 제 루틴 계획을 검증대에 올렸습니다.
1. 첫 라운드부터 날아온 뼈아픈 질문
터미널을 켜고 Claude Code에게 제 계획을 던졌습니다.
"퇴근 후 피곤에 지친 직장인이 엑셀이나 업무 팁을 정리해서 티스토리 블로그에 글 1편을 발행하는 루틴 계획입니다. 원래는 '퇴근 후 매일 45분 집중해서 글쓰기'로 잡으려 했는데, 솔직히 퇴근하고 씻고 밥 먹으면 뇌가 방전되는데 매일 45분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직장인은 거의 없습니다."
엔터를 치자마자 1라운드 루트 질문 5개가 쏟아졌는데, 특히 Q3 질문에서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질문 Q3 - 실제 가용 시간: 평일과 주말에 글쓰기에 쓸 수 있는 시간을 실제로 측정해 본 적이 있나요?
AI 추천 답: "평일 발행 작업은 0분으로 두고, 주말 1회 90분 몰아쓰기로 설계하세요. 평일 45분은 계획서 상의 숫자일 뿐이고, 기록 없이 정한 시간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습니다."
보통의 AI라면 "45분을 15분씩 쪼개보세요" 같은 모범 답안을 줬을 텐데, 이 녀석은 "퇴근 후 45분은 당신의 환상일 뿐이니 평일 작업 시간은 0분으로 치라"고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제가 속으로 품고 있던 가장 큰 불안을 첫 질문에서 정확히 찔린 셈입니다.
2. AI의 훈수에 반박하며 찾은 절충안
하지만 평일을 완전히 0분으로 비워두면, 일요일에 백지 상태에서 90분을 채워야 하므로 주말 부담이 너무 커집니다. 주말 약속이라도 생기면 그 주 전체가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AI의 추천을 그대로 받지 않고 역으로 절충안을 던졌습니다.
- "평일에 글을 쓰려고 하니까 뇌가 터지는 거다. 평일에는 글쓰기를 완전히 0분으로 배제하되, 근무 중에 엑셀 에러가 난 화면 캡처 1장과 스마트폰 메모 3줄(5분)만 누적하겠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 이 메모 1장만 보고 45분 만에 끝내는 구조로 가자."
제가 이 반박을 던지자, AI의 '설계 트리'가 즉시 다음 단계(2라운드)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실용적인 안전장치 두 가지가 튀어나왔습니다.
45분 타임박스 강제 종료 (Q6)
AI는 "45분을 넘기면 그 시점에 글을 있는 그대로 발행합니다."라고 권고했습니다. 글을 더 잘 쓰겠다고 1시간, 2시간 붙잡는 순간 다음 주 발행이 밀리고, 결국 중단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였습니다. '완벽함'보다 '마감 시간 엄수'를 상위 규칙으로 둔 것입니다.
비상용 예비 소재(버퍼) 3건 선확보 (Q8)
"평일 내내 바빠서 에러 캡처를 한 건도 못 건진 주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AI는 "이를 위해 시작 전 예비 소재 3건 이상을 먼저 확보하세요."라고 권고했습니다. 소재가 고갈된 첫 번째 주에 루틴이 박살 나는 것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방어벽이었습니다.
3. 권한 차단 고비와 2차 실행으로 얻어낸 진짜 팩트 폭격
여기서 한 번의 큰 고비가 있었습니다.
2라운드 도중, AI는 제 블로그(vagrant.tistory.com)의 기존 글 상태를 분석해서 템플릿을 짜주겠다며 웹 조사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터미널에서 권한 차단이 걸리며 실행이 완전히 멈춰 섰습니다.
"기존 21편 조사는 실패했습니다. 블로그 접근 권한이 거부되어 제목, 길이, 도입부, 스크린샷 유무 중 어느 것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수동으로 글 샘플 몇 줄 복사해 주고 넘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왕 AI에게 털리기로 한 거, 실제 내 블로그 글을 직접 읽고 평가하게 만들어야 진짜 처방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터미널 실행 옵션에 WebFetch 권한 허용 옵션을 붙여 2차 실행(재크롤링)을 감행했습니다.
그러자 AI가 실제 제 블로그 글로 들어가 본문을 정밀 분석하더니,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뼈아픈 피드백들을 쏟아냈습니다.
1. 에러 화면 캡처가 없다: 트러블슈팅 글을 읽는 독자는 자기 화면과 글을 대조해 보길 원하는데, 검증 표만 있고 정작 캡처 이미지가 없어 독자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2. 글 끝에 독자 질문이 없다: 글이 일방적인 설명으로 끝나다 보니 사이드바를 확인해 봐도 댓글 달린 글이 1개뿐이라며, 마지막에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 체류와 참여를 유도하라고 짚어냈습니다.
3. 제목이 사이드바에서 잘린다: 모바일과 사이드바에서 핵심 증상이 말줄임표(...)로 잘리지 않도록 앞 25자 안에 핵심 키워드를 넣으라는 피드백도 함께 받았습니다.
만약 차단당했을 때 대충 넘겼다면 "그냥 기능 템플릿"만 얻고 끝났을 텐데, 권한을 풀고 2차로 들이받은 덕분에 제 블로그의 진짜 약점을 짚어낸 실질적인 글쓰기 기준이 세워졌습니다.
4. 15분 만에 확정된 '퇴근 직장인 현실 루틴'
2차 분석까지 반영하여 마지막 4라운드까지 문답을 주고받은 결과, 총 15분(4라운드, 16개 질문) 만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행 시스템이 완성되었습니다.
주간 타임라인
- 월~금 (하루 5분): 퇴근 후 노트북 켜지 않음. 업무 중 막혔던 에러 캡처 1장 + 스마트폰 메모 3줄만 저장.
- 일요일 20:15~20:55 (45분 타임어택):
| 구간 | 소요 시간 | 작업 내용 |
|---|---|---|
| 1구간 | 0~5분 | 평일 누적된 메모 중 1개 선택, [에러명 + 상황] 25자 제목 확정 |
| 2구간 | 5~10분 | "월말 정산 중 에러가 났다" 같은 실무 상황(PAIN) 2문장 작성 |
| 3구간 | 10~25분 | 재현 -> 원인 -> 해결 본문 작성 (분량 1,800~2,200자 상한) |
| 4구간 | 25~35분 | AI 지적 반영: 화면 대조용 캡처 3~4장 의무 배치 |
| 5구간 | 35~40분 | 내부 관련 글 링크 1개 추가 |
| 6구간 | 40~45분 | 독자 질문 1줄 확인 후 21:00 예약 발행 걸고 노트북 덮기 |
타이머가 45분에 울리면 문맥이 조금 어색해도 손을 떼고 발행을 누르기로 정했습니다.
5. 써보고 느낀 솔직한 장단점
혼자 계획을 세웠다면 "매일 퇴근하고 45분씩 열심히 써야지"라고 적어두고, 화요일쯤 야근하고 돌아와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며 포기했을 것입니다.
grill-me는 "내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퇴근 후 직장인의 에너지가 얼마나 바닥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베테랑 사수처럼 제 계획의 허세를 사정없이 깎아내 주었습니다.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계획은 거창하게 세우는데 항상 둘째 주를 못 넘기고 흐지부지되는 분.
- 내 계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요일, 몇 시에, 무슨 일이 터져서 실패할지' 미리 공격받아보고 싶은 분.
- 이런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 아직 실행할 아이디어도 구체화되지 않았는데 비판부터 들으면 의욕이 꺾이는 분.
- Claude Code를 쓸 수 있는 계정이 없는 분 (저는 Claude Pro 구독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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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퇴근 후 루틴은 실제로 몇 분이나 지켜지고 있나요? 혹시 계획서에만 적어두고 매번 포기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면 댓글로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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